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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다락방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뒤늦게 인정받은 걸작

by ▤♪▧♬▥ 2020. 5. 25.

 

 

이 대작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5일

표트르 차이코프스키(Pyotr Tchaikovsky, 1840~1893년)는 베토벤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 그리고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등의 작품은 자주 무대에 오르고 있다.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과 서구의 작곡기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그의 음악은 풍부한 서정성과 국제적인 감각까지 갖추고 있으니 이토록 널리 사랑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개인적인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동성애 성향이 그를 항상 불안하게 했으며, 결국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를 감추기 위해 37세가 되던 1877년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혼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1877년 9월, 차이코프스키는 안토니나 밀류코바와의 지옥 같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거의 광기에 가까운 상태로 도망치듯 모스크바를 떠났다. 그는 결혼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생과 함께 베를린, 로마, 파리, 베니스, 비엔나 등을 떠돌았다. 몇 달 동안 정처 없이 발랑을 계속했던 차이콥스키는 1878년 봄에 스위스의 클라렌스에 머물며 서서히 정신적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폰 메크 부인의 풍부한 재정 지원과 따뜻한 편지로 용기를 얻어 새로운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었다.

 

그해 3월 14일, 한 음악가가 차이코프스키를 방문했다. 그가 바로 차이코프스키가 각별히 아꼈던 그의 제자이자 베를린에서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사사한 바이올리니스트 코텍이다. 그는 클라렌스에 머무는 동안 차이코프스키에게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으며 그중에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특히 색채감이 풍부한 랄로의 바이올린 음악과 코텍의 연주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로부터 사흘 뒤인 3월 17일에 당장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작곡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차이코프스키는 창작의 기쁨에 흠뻑 도취해 있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1878년 3월 19일자 편지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 언급했다.

 

"오늘 1악장이 완성되었고, 내일 2악장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저의 음악적 영감은 지금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틈도 없이 작곡에 몰두하고 있어요.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의식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곡의 순수한 기쁨이지요."

 

순수한 창작의 기쁨에 몰두한 차이코프스키가 이 대작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25일. 당시 그가 얼마나 창작 의욕에 불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혹평에 시달려야 했던 차이코프스키의 걸작

차이콥스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했을 때 코텍은 연주 기술의 문제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차이콥스키는 이미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이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가리켜 "피아노 연주에 적합하지 않다."라고 혹평했던 사실에 크게 상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이올린 협주곡만은 그런 비판을 받지 않도록 코텍의 충고에 열심히 귀 기울였다. 코텍은 차이콥스키에게 1악장의 몇 군데를 수정하도록 권유하고, 완성된 2악장 안단테 대신 새로운 안단테를 작곡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차이콥스키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차이콥스키가 본래 바이올린 협주곡의 2악장으로 작곡했던 안단테 악장은 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곡에 비해 새로 바이올린 협주곡의 2악장으로 새로 작곡된 칸초네타는 훨씬 더 우아하고 독창적이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완성되기까지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조언을 아끼지 않은 코텍은 이 작품을 무척 아름답게 연주했지만, 자신이 직접 스승의 작품을 초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는 이 협주곡을 당시 러시아 바이올린 음악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었던 바이올린의 거장 레오폴트 아우어에게 헌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우어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이 작품을 바이올린에 맞게 고치지 않는 한, 이걸 그대로 연주할 수는 없소."

 

결국 이 작품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881년 12월 4일에 비엔나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의 바이올린 연주와 한스 리히터가 지휘하는 빈 필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그러나 초연 당시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브로드스키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 작품을 연주하겠다고 나섰으나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을 단 한 번 밖에 하지 못했다. 이렇게 길고 어려운 작품을 단 한 번의 리허설로 완벽하게 연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단 한 번뿐인 리허설 시간은 오로지 스코어에 잘못 기보된 음표를 수정하는 데 전부 써버렸으니 연주가 잘될 리 없었다. 이 생소한 악보를 거의 초견으로 연주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혹시나 큰 실수를 할까 두려워 지나치게 작은 소리로 연주했고, 독주자와의 앙상블도 삐걱거렸다.

 

결국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매우 차가운 반응을 보이며 "야만스럽고 불쾌한 음악" "광포한 러시아 니힐리즘"이라고 혹평했다. 그 중에서도 음악평론가 한슬릭은 오늘날 베토벤과 브람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날 저녁 음악회를 지켜본 한슬릭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바이올린의 명인 아돌프 브로드스키는 그의 비엔나 데뷔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무분별한 일을 저질렀다. 차이콥스키는 확실히 보편적인 재능이라고는 없는 음악가이고, 온실 속에서 자라난 방종한 천재다. 그의 작품은 뛰어나지도 않고 매력도 없다. 그의 음악에는 독창성과 야만성,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와 불안한 예민함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런 특징은 그의 최근작인 길고 난해한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얼마 동안 이 음악은 음악적으로 꽤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곧 1악장이 끝날 때까지 그 무자비한 야만성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이올린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마구 긁히고 찢기고 두들겨 맞았다.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이 복잡한 악구를 과연 누가 깨끗하게 연주할 수 있는지 정말 의문스럽다. 브로드스키는 이를 시도했으나 결국 그 자신이나 우리 모두를 괴롭혔다. 부드러운 슬라브 풍의 감상적인 느린 악장에서 청중들은 다시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빨리 중단되고 광포하고 우울한 마지막 악장으로 이어졌는데, 거기서 우리는 타락하고 거친 얼굴을 보며, 야비한 저주를 들었으며, 질 낮은 술 냄새를 맡았다. 프리드리히 피셔는 음란한 그림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 적이 있다. 그림 속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를 분명히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마찬가지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사상 처음으로 음악 작품에서도 악취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한슬릭의 무자비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드스키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1882년 8월 20일에는 이 곡을 모스크바에서도 연주했는데, 그때는 훨씬 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때부터 브로드스키는 이 협주곡을 독일과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연주했고, 1890년대 초에는 뉴욕에서도 연주했다. 마침내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청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바이올리니스트의 필수 레퍼토리로 정착되었다.

 

처음에는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우어마저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이 협주곡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차이콥스키가 죽기 얼마 전에 드디어 이 작품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이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된 아우어는 이 작품의 위대한 해석자가 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곡을 가르쳤다.

 

바이올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오늘날의 음악학자들은 이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들 가운데서도 가장 바이올린이란 악기에 어울린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처음에 이 작품이 거부된 이유는 바이올린 연주에 적합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바이올린의 거장 아우어마저도 이 작품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에는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바이올린의 기술적 한계와 표현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1악장과 3악장은 길이도 매우 긴 데다 두세 음악을 한꺼번에 소리내야 하는 중음 주법이나, 활을 튀어 오르듯이 연주하는 스피카토 등의 난해한 주법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 곡을 익히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한 악구들이라고 일단 손에 익으면 손가락을 움직이기가 편하고, 기본 조성이 바이올린 연주에 적합한 D장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선율이라도 잘 공명된 소리로 연주할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이라면 감미롭고 서정적인 선율로 가득해서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음색과 표현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난해단 기교로 가득 찬 1악장에서도 2개의 주제만큼은 매혹적인 서정적을 풍기고 있어 선율 악기인 바이올린의 노래하는 듯한 특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 특히 가장 나중에 작곡된 제2악장 안단테 칸초네타의 흐느끼는 듯한 주제는 일품이다. 이 감각적인 선율에 풍부한 감정을 실어 연주하는 것은 바이올리니스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며, 그 달콤한 선율에서 무한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그 음악을 이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리라.

 

2악장에 비해 마지막 피날레는 러시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활발한 음악이다. 피날레의 첫 주제는 분명히 민속 음악적인 요소에서 온 것으로 러시아의 민속 춤곡의 리듬을 연상시킨다. 피날레의 두 번째 주제 역시 민요적이지만 여기에는 집시 풍의 요소도 끼어들어 좀 더 이국적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집시 바이올리니스트들과 집시 현악 밴드들이 유행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 역시 이런 종류의 음악을 음식점이나 길거리에서 들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에는 그 당시 차이코프스키가 길거리에서 들었을 법한 집시 음악의 자취가 발견된다. 여기에다 긴박감 넘치는 러시아 민속 춤곡의 리듬이 결합되어 이 협주곡의 피날레에서 우리는 불꽃 튀는 듯한 음악적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초연 당시의 평가가 어떠했든 오늘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무르익은 낭만주의 음악을 대변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이 작품에서 유럽과 러시아 민속음악을 결합시킨 음악적 드라마가 나타나며 서정성, 그리고 눈부신 기교까지 갖추고 있어서 바이올리니스트를 가장 돋보이게 해주는 암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처음 작곡되었을 당시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의 대부인 아우어마저도 이 협주곡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 명곡을 이해하는 데는 얼마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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