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 다락방

베토벤의 맥을 잇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

by ▤♪▧♬▥ 2020. 5. 24.

 

고독하면서도 열정적인 브람스의 음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국내에서 '이수'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적이 있는 영화 <굿바이 어게인>에서 25세의 청년 시몬이 39세의 중년 여성 폴르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대사다.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명배우 잉그리드 버그만(폴르 역)과 안소니 퍼킨스(시몬 역)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그들을 맺어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년)의 음악이다.

 

14살 연상의 폴르에게 매혹된 시몬은 브람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며 그녀에게 접근한다. 폴르를 음악회에 데려간 시몬은 그녀와 함께 교향곡 제1번 4악장을 듣는다. 오케스트라가 벅찬 환희의 선율을 연주하는 동안, 폴르는 시몬이 아닌 로제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지만 시몬의 시선은 오로지 폴르에게로 향한다. 폴르의 반응이 미지근할수록 시몬의 집착은 더욱 강해지고 그럴수록 폴르의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어차피 맺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암시하에 출발한 위태로운 사랑의 줄타기가 펼쳐지는 동안 그들의 복잡한 감정은 고독하면서도 열정적인 브람스의 음악으로 표현된다.

 

늦가을에 어울리는 브람스의 음악

작곡가 브람스 역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브람스가 일생 동안 흠모했던 클라라 슈만 역시 영화 속의 폴르처럼 14년 연상이었다. 스승이나 다름없는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왔던 브람스의 음악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암시하듯 어딘지 모를 고독감을 담고 있어 낙엽이 지는 늦가을의 정치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영화 <굿바이 어게인>에서 폴르와 시몬이 함께 감상한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은 브람스가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에 감명을 받아 구상한 이후 무려 21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야심작으로, 브람스 특유의 우수어린 선율과 쓸쓸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운명의 발자국 소리와 같은 1악장의 도입부에서부터 벅찬 환희로 가득한 4악장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구성미가 돋보여 베토벤 이후 쇠퇴해간 독일 관현악의 자존심을 세운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교향곡 제1번의 작곡에 심혈을 기울인 긴 세월 동안 브람스를 괴롭힌 것은 베토벤이 남기고 간 9곡의 교향곡이었다. 브람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베토벤을 "거인"이라 칭하며 이렇게 적었다.

 

"거인이 내 뒤로 뚜벅뚜벅 쫓아오는 소리를 항상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보게. 그때 그 기분을 자네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걸세."

 

교향곡을 쓰려는 야망을 품었던 22세의 청년 브람스가 거인 베토벤을 의식하며 그의 첫 교향곡을 완성했을 때 그는 이미 43세가 되어 있었다. 오랜 산고 끝에 완성해낸 브람스의 첫 번째 교향곡 속에는 오랜 투쟁의 세월 동안 그의 뒤를 따르던 베토벤의 발자국소리가 마치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집요한 리듬처럼 끈질기게 울려 퍼진다. 1악장의 서주를 여는 불길한 팀파니의 박동은 브람스의 강박관념을 나타내듯 끊임없이 반복되고, 반음씩 상승하는 현과 반음씩 하강하는 관의 선율이 교차하며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한 인간의 갈등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윽고 빠른 템포로 바뀌면서 팀파니의 동기는 베토벤의 운명의 동기를 닮은 4개의 음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1악장에서 제시된 불운한 운명은 4악장에 이르러 마침내 환희로 승화된다. 고통스러운 운명이 호른과 트롬본의 신성한 멜로디로 정화되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닮은 벅찬 선율이 울려 퍼지면서 승리로 이끌어간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10번'이라 불린 교향곡

고통을 극복하고 승리에 이르는 이러한 구성은 베토벤 교향곡의 구조와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한스 폰 뷜로우는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을 '제10번'이라 부르기도 했다. 제10번이란 물론 베토벤의 교향곡 제10번을 뜻하는 것으로, 뷜로우는 브람스가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제9번에 이어 그에 필적할 만한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뜻으로 이 곡을 제 10번이라 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브람스 교향곡이 간직한 내면적 아름다움은 베토벤의 외향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4악장에서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호른의 테마는 서서히 해가 떠오르듯이 등장하며 조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화해의 기쁨을 표현해낸다. 베토벤이 그의 <운명>교향곡 4악장에서 화려하고 자극적인 트럼펫의 팡파르로 운명의 가혹함을 당당히 물리치고 환희와 승리를 힘차게 선언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또 환희의 순간을 담은 현악의 주제 역시 베토벤 <합창>교향곡의 영웅적인 제스처에 비하면 훨씬 더 서정적이고 명상적이다. 환희와 기쁨마저 내면으로 거두어들여 은근하게 표현해내는 브람스의 음악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한 여인에 대한 남모를 사랑을 간직해온 그의 내면적 열정을 반영하는 듯하다.

 

실제로 브람스는 이 교향곡에 은근한 사랑 고백을 담아내기도 했다. 브람스가 교향곡 제1번 4악장의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한 호른의 테마에는 그가 사랑하는 클라라와의 개인적인 사연이 담겨 있다. 브람스는 언제나 클라라의 영명 축일에 보낸 엽서에 호른의 멜로디를 적어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 그는 이 멜로디와 함께 "산보다 높이, 골짜기보다 깊이, 나는 당신에게 천 번의 인사를 보냅니다."라는 글귀를 곁들였다. 언뜻 보면 영명 축이ㅣㄹ을 축하하는 평범한 축하메세지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엽서를 보내기 전 클라라와 약간의 말다툼을 했던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내는 화해의 메시지다. 브람스는 그의 교향곡 제1번에서 고통이 환희로 바뀌는 가장 극정인 순간에 클라라에게 보낸 화해의 멜로디를 집어넣어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브람스의 음악은 그의 꾸준한 사랑처럼 내면적 열정을 간직하고 있기에 귀에 쏙 들어오는 매혹적인 선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신중하고 끈기 있는 그의 성품과도 같이 브람스의 음악은 꾸준한 반복청취와 인내심을 요한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깊은 맛이 우러나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매력을 갖추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