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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다락방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 음악의 왕, 하나님의 종

by ▤♪▧♬▥ 2020. 5. 23.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가 직접 작성한 악보에는 특이한 표시가 있다. 작품 시작 부분에는 "J. J. "가, 끝 부분에는 "S. D. G." 또는 "I, N. J. "라는 암호 같은 글자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글자들은 모두 라틴어 줄임말이다. J. J. 는 'Jesu Juva'(예수여 도움을 주소서)이고, S. D. G.는 'Soli Deo Gloria'(신께 영광을), I. N. J.는 'In Nomine Jesu'(에수의 이름으로)를 뜻한다.

 

바흐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음악가였다. 자시의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 바흐의 음악 역시 신과 무관한 작품이 없다. 그는 종교음악은 물론이고, 모든 세속 장르 작품의 마지막에도 반드시 'S. D. G.'라는 약자를 써 넣었다. ('BWV'는 1950년 독일의 음악학 연구가 볼프가 슈미더가 바흐 작품을 분류하며 붙인 번호로 오늘날 바흐 전 작품의 목록 번호로 쓰인다.)

 

열 살에 고아가 된 소년의 꿈

알려진 대로, 바흐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수세기에 걸쳐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 집안이다. 그의 선조들은 오르간이나 바이올린 주자로 독일 중부 튀링겐 지역을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 왔다. 바흐의 성씨인 '세바스티안Sebastian'이 인근에서는 '음악가'라는 일반명사로 통할 정도였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도 음악가였다. 그러나 당시 음악가는 오늘날처럼 대우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음악가나 구두 수선공이나 똑같은 직공 혹은 장인일 뿐이었다. 

 

1685년 3월 21일, 튀링겐 주 아이제나흐에서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바흐에게 아버지는 가풍에 따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아이제나흐 공국(공작령)의 음악감독으로 연주 실력이 뛰어났고, 아버지의 사촌 형제 크리스토프는 공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어린 바흐는 당시 서민 아이들이 그러하듯 초급 독일어 학교와 라틴어 학교를 다니며 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몇몇 형제들에 이어 1694년에는 어머니가,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바흐는 고작 열 살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이제 열 살짜리 꼬마가 의지할 데라곤 이웃 도시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큰형 크리스토프뿐이었다. 바흐보다 열다섯 살이나 위인 크리스토프는 바흐와 바흐보다 세 살 많은 야코프 형제가 의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바흐가 태어난 이듬해부터 나가 살기 시작한 큰형은 동생들에게 큰 애정이 없었다. 더욱이 갓 결혼한 신혼이었다. 일반적으로 바흐가 큰형 크리스토프에게 클라비어(피아노의 전신)와 음악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7세기에는 악보가 귀했다. 오르간 주자로 일하던 크리스토프는 당시 유명한 하프시코드 곡들을 베낀 필사본 악보들을 벽장 속에 고이 보관했다.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악기 연주를 배운 바흐는 그 악보들이 못내 궁금했다. 그러나 졸지에 타지에서 두 동생을 떠 맡게 된 형은 동생들에게 벽장 열쇠를 절대로 내주지 않았다. 바흐는 형이 잠들고 나면 몰래 벽자 속 악보를 빼내어 작은 손가락으로 달빛을 조명 삼아 베꼈다. 여섯 달이나 걸린 이 비밀 작업은 마지막 순간 형에게 들키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바흐는 이 일로 평생 그를 괴롭히는 약시를 얻었다. 세상을 떠날 무렵, 바흐는 눈이 먼 상태였다고 한다.

 

그 이듬해 바로 위 형 야코프마저 아이제나흐로 돌아가면서 열한살 소녀 바흐가 마음을 둘 대상은 음악밖에 없었다. 바흐는 열다섯 살이 되는 1700년이 되어서야 큰형의 집을 떠났다. 학교 선생이 북쪽 뤼네부르크 지역 미하엘 학교의 합창 장학생 자리에 바흐를 추천해 준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바흐의 음악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합창 장학생이었지만 성악보다는 기악에 관심이 많았던 바흐는 오르간과 클라비어 연주를 잘했다.

 

1707년 스물두 살이 된 바흐는 튀링겐으로 다시 돌아가 형들처럼 교회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뮐하우젠 시에 자리를 잡은 그는 그곳에서 6촌 누이동생 마리아와 결혼했다. 이렇게 하여 두 명의 부인과 스무 명의 자식으로 요약되는 생활 음악가 바흐의 성실한 가장인생이 시작되었다.

 

대위법에 담긴 서양음악의 정신

바흐는 이후 오르간 연주자, 궁정 악사, 교회 합창단 감독으로 생계를 이었다. 바이마르와 괴텐 지역을 거쳐 정착한 라이프치히에서 27년간 한 교회의 합창단 감독으로 일하며 생을 마쳤다. 라이프치히에 바흐 박물관이 있고, 그의 묘가 성 토마스 교회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뮐하우젠에 이어 바이마르 궁정예배당 오르간 주자가 된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너무도 사랑했다. 웅장하고 경건한 소리를 내는 오르간은 당시 교회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악기였다. 바흐는 뛰어난 음악가였지만, 근본적으로 성실한 생활인이었다. 그는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책임진 대가족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교회 월급봉투를 평생 모을 정도로 꼼꼼했다. 무엇보다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매사 겸손하고 노력하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는 바흐 음악의 기본 정조이기도 하다.

 

"땅 위에서도, 바다에서도, 집에서도, 밖에 나가서도 파이프를 피우며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흐의 인생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걷힐 날이 없었다. 어린 시절 열이어 목격한 형제들과 부모님의 죽음, 결혼 후에는 첫 번째 부인에 이어 스무 명의 자식 중 열 명을 잃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자식, 형제, 남편, 아버지로서 바흐가 느낀 절망과 슬픔, 그리고 마지막엔 순응의 감정을 어루만져 줄 대상은 오직 신밖에 없었다.

 

그를 괴롭힌 것은 죽음만이 아니었다. 서민이라는 신분상 어디에 가든지 간에 늘 경쟁을 해야 했는데, 연줄 없고 고지식한 바흐는 밀리기 일쑤였다. 1716년 바이마르 궁정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시절엔 궁정 악장이 사망하여 당연히 악장 직을 승계할 줄 알았으나, 보잘것없는 실력의 악장 아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다.

 

바흐는 죽음과 부조리에 직면할 때마다 신 앞에 엎드렸다. 오르가니스트나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지휘자, 악장)라는 교회의 직책은 그가 몸을 낮추고 신께 다가가는 예술적 도구였다. 바흐 하면 떠오르는 '대위법'도 종교음악에서 나왔다.

 

대위법(cointerpoint)은 바로크 시대에 바흐가 완성시킨 작곡기법으로,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독립적인 멜로디를 동시에 결함시키는 것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음악의 구조를 수직 축(음의 겹침)과 수평 축(음의 배열)으로 나눌 때 음정의 어울림(화성)을 연구하는 것이 화성학이라면, 이 음정들로 구성된 선율 간의 수직적 관계를 중시하므로 화성학과 대위법을 완전히 분리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대위법에 능통하려면 음의 논리적 구성력이 탁월해야 한다. 대위법이 중세 교회음악에서 발달한 데에는 그만 한 이유가 있다. 당시 교회음악을 지배하는 것은 교회선법(church modes), 즉 레-미-파-솔 음을 각각 시작음으로 하는 정격 선법과 그 4도 아래서 시작하는 변격선법이었다. 이 정격선법(도리아, 프리지아, 리디아, 믹소리리아)과 변격선법(히포프리지아, 히포리디아, 히포믹소리리아)에서 8개의 선법이 나왔다, 바흐가 활동한 18세기에는 조성이 확립되어 대위법도 조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흐의 곡을 보면, 단순한 돌림노래 차원을 넘어선 다른 화성(수직) 진행에 따른 정교한 선율(수평) 구성을 목격할 수 있다. 다양한 화성이 선율, 조성 등을 정교하게 계산하고 맞춰서 각 곡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한 것이다. 

 

기독교음악을 바탕으로 발달한 서양음악은 기본적으로 각 음의 논리적 타당성과 음들의 합리적 조화를 중시한다. 그러니 주관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음악이 아닌 정교하기 짜인 객관적인 음악을 추구하게 되었고, 대위법은 이 같은 인위성을 대표하는 기법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방식대로, 음 하나하나를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 대위법을 사용하는 작곡 방식 중 가장 고난도 기법이 '푸가fuga'이고, 다른 성부의 선율을 모방하는 대위법의 한 기법이 '캐논canon'이다.

 

바흐가 눈병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작곡한 미완성 대작 <푸가의 기법 BWV 1080>(1749)에는 대위법의 기술이 집대성되어 있다. 네 곡의 캐논과 열다섯 곡의 푸가로 구성된 이 작품은 하나의 주재를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미완성인 탓에 악기 구성 같은 구체적인 지시가 없고, 음악의 진행도 난해하지만 바흐 예술의 궁극을 담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바로크음악의 또 다른 걸작이자 전범으로 평가받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BWV 846-869> 역시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쓴 전주곡(프렐류드)과 푸가 모음곡 두 권으로 되어 있다. 다장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 다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 ····· 이런 식으로 서양음악의 전 조성을 담고 있다. 19세기 명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 곡들을 가리켜 '건반음악의 구약성서"라 평했다.

 

상대성이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바흐를 가리켜 "합리적 원칙으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장인"이라 한 것은 이 같은 철저한 인위성에 기인한다. 바흐는 뛰어난 예술적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갈고 닦으면 누구나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성실함의 대명사, 바흐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우주를 떠도는 불멸의 음악

바흐가 수(숫자)에 집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도 부인 못한 사물의 객관적 측면과 합리적 측면을 대변하는 것이 숫자가 아닌가, 바흐는 수의 종교적 상징성을 음악에 가져다 썼다.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칸타타(성악곡의 일종) 곡들에 '의미심장한' 수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선 숫자 '7'이 있다. 7은 기독교 신학에서 천지창조 중 제 7일, 즉 하나님이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고 안식을 취한 거룩한 안식일을 상징하는 완벽한 수이다. 바흐 칸타타 아리아 <지극히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 BWV 113>에서는 "위로와 생명이 충만한 말씀"이란 가사가 7번 반복된다.

 

'5'는 예수와 관련이 있다. 5는 5개의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오성을 소유한 인간을 가리키며, 예수가 십자가에 5번 못 박혔음을 상징한다. 칸타타 <고통의 심연에서 나는 당신께 울부짖나이다 BWV 38>에는 '위로trost'라는 단어가 5번 반복되고, <지극히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 BWV 113>에서는 "예수가 우리 죄인을 용서하시고"가 5번 반복된다.

 

'11'은 신학적으로 '초과'와 10이 상징하는 법칙을 거부하는 의미로 받아들어졌지만, 바흐는 이 숫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충직한 제자들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내 주는 강한 성 BWV 80>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라"가 11번 반복된다.

 

기독교에서 '13'은 불길한 배반의 숫자이다. 예수와 12제자가 모딘 13인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이다. <예수, 내 영혼을 가져간 주님이여 BWV 78>에서는 "나는 죄악이 자식이니"가 13번 나온다.

 

바흐는 숫자 14와 41을 좋아했다. 14는 그의 성 'BACH'의 알파넷 순서 2, 1, 3, 8을 합한 수이고, 41은 14에 그의 이름 'Johann Sebastian'의 첫 자인 J. S. 의 알파벳 순서 9와 18을 합한 수이다. (라틴어에는 J가 없기 때문에 10과 19에서 1씩 뺀) 바흐는 숫자 14에 14개의 주옥같은 작품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바흐가 1747년 미출러의 음악학 협외에 뒤늦게 가입한 것도 협회의 14번째 회원이 되려고 2년이나 기다렸기 때문이다.

 

바흐는 사로잡은 또 다른 숫자는 '84'이다. 84는 바흐가 아끼는 수 14에 천지창조의 기간인 6을 곱한 수로, 바흐 작품의 상당수가 84마디로 되어 있다. 84라는 수는 어쩌면 바흐 자신(14)과 신(6)의 합일을 가리키는 수가 아니었을까?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바흐의 음악은 당시 대중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든 곳들은 1750년 그의 죽음을 동시에 여리 저리 흩어지고 말았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생계를 이어 가고자 바흐의 악보를 헐값에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잊혀지던 바흐는 그로부터 79년 후인 1829년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던 약관의 천제 멘델스존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저 유명한 <마태수난곡>의 자필 악보가 푸줏간 고기 포장지로 쓰일 뻔했다.

 

1977년 8월 20일, 미국이 발사한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 2호에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외계인에게 보내는 '지구의 소리'가 금도금 음반에 녹음되어 실렸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 함께 지구의 소리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바흐의 <프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F장조 BWV 1047>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 2권 중 전주곡과 푸가,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3번 E장조 BWV 1006> 중 가보트와 론도가 선정되었다. 하나님의 대한 그의 열망과 존경대로 그의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계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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